2025년 제78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12년 만에 단 한 편도 초청되지 않았다. 한국영화의 경쟁력 약화 원인을 분석한다.
칸에서 사라진 한국영화, 12년 만의 충격
2025년 4월, 제78회 칸국제영화제가 공식 초청작 53편을 발표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작품들이 이름을 올렸지만, 그중 ‘한국영화’는 없었다. 단 한 편도. 2012년 이후 단절 없이 칸영화제와 연결되어 있던 한국영화가 12년 만에 ‘0편 초청’이라는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초청 여부를 넘어, 한국 영화의 경쟁력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이전의 한국영화는 분명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까지 정복했고, 박찬욱 감독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한국 배경 영화들 또한 꾸준히 초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는 국제 영화제보다는 국내 극장 수익, 혹은 넷플릭스를 통한 OTT 진출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시장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콘텐츠의 성격과 철학, 제작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서서히 한국영화를 칸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영화는 지금 이 시점에서 칸에게 외면당했을까? 단순히 '좋은 영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산업 전반의 다양성 붕괴와 투자 구조의 고착화, 관객 취향과 플랫폼 변화의 미스매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1. OTT 시대와 극장의 몰락, 소비 패턴의 급변
한국영화의 경쟁력 약화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변화는 콘텐츠 소비의 플랫폼 전환이다. 이는 단지 관람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 투자, 유통, 관객의 감상 태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변화로 이어졌다.
2019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영화 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극장 중심의 전통적인 유통 구조에 의존하던 한국영화계는 강제적으로 대전환을 겪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극장이 폐쇄되거나 관객 입장이 제한되면서, 영화 개봉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등장한 대안이 바로 OTT(Over The Top) 플랫폼이다.
넷플릭스, 디즈니+, 티빙, 웨이브, 왓챠 등 다양한 OTT 플랫폼들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게 되었다. 팬데믹 동안 '승리호', '낙원의 밤', '서울대작전', '길복순' 등 대형 상업영화조차 극장 개봉 없이 OTT에서 직행 공개되며, 한국영화의 유통방식이 크게 변화했다. 이는 관객의 습관을 바꿨고, 결과적으로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처음 만나는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극장의 위기는 단순히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 종식 이후에도 극장 관객 수는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잇달아 영화 티켓 가격을 인상하면서,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 한 편 보는 데 1인당 1만 5천 원 이상’을 지불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청년층이나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며, 이는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흐름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렇다면 OTT는 과연 한국영화의 새로운 기회일까? 표면적으로는 더 많은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긍정적 변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동반하고 있다. OTT는 글로벌 플랫폼 중심으로 수익 배분 구조가 매우 제한적이며, 일정 기준 이상의 조회수가 없으면 수익도 크지 않다. 또한 OTT용 영화는 ‘긴 호흡의 예술’보다는 ‘빠른 몰입과 직관적인 서사’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요구하기 때문에, 예술영화나 작가주의적 영화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제작 방향성이 OTT 중심으로 쏠리면서, 극장에서 볼 수밖에 없는 영화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23~2025년 사이 관객 수 100만 명을 넘긴 영화 중 다수가 시리즈물, 프랜차이즈 영화, 장르물 중심이며, 그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OTT에서 후속작을 공개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칸영화제와 같은 전통적인 영화제와의 접점을 더욱 줄어들게 만든다. 칸은 철저히 극장 상영을 전제로 하는 영화의 형식을 중시하며, OTT 오리지널 영화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영화가 OTT 중심으로 재편되는 지금의 흐름은, 칸과의 철학적/구조적 단절을 심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OTT 플랫폼의 급부상과 극장 시스템의 약화는 단지 유통의 변화가 아니다. 이는 영화 제작과 소비의 철학 자체를 바꾸는 거대한 흐름이며, 이 과정에서 한국영화는 ‘칸이 요구하는 영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국제 영화제 무대에서 다시 존재감을 회복하려면, 단순한 OTT 흥행 공식에서 벗어나 극장에서만 가능한 예술적 시도와 깊이를 복원해야 한다.
2. 콘텐츠 다양성 붕괴와 투자 위축 – 한국영화 위기의 본질
2025년 현재 한국영화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바로 콘텐츠의 다양성 붕괴와 투자 시장의 극단적 위축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한국영화의 창의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갉아먹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첫째, 한국영화계는 오랜 시간 동안 스크린 독과점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형 배급사와 투자사가 자본과 유통망을 독점하면서, 이들이 선택한 상업영화만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예술영화, 여성서사, 독립영화, 다문화 소재의 작품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소외되고, 극장 상영 자체가 어려운 현실에 놓인다. 영화 제작자들은 배급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해, 아예 시장에서 도태되기 일쑤다.
둘째, 팬데믹 이후 영화산업 전반에 투자 위축이 발생하면서, ‘실험’은 거의 사라졌다. 국내 주요 투자사는 영화 투자 대신 안정적인 OTT 콘텐츠, 드라마 시리즈 혹은 유튜브 기반 콘텐츠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라는 형식 자체가 “리스크가 큰 미디어”로 분류되고 있으며, 영화 투자자는 확실한 흥행 장르에만 베팅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범죄도시’ 시리즈의 성공으로 상징되는 남성 중심 액션/범죄/복수극에 대한 과도한 집중으로 이어진다. 과거 한국영화는 ‘밀양’, ‘시’, ‘시체가 돌아왔다’, ‘버닝’ 같은 작품들을 통해 여성 서사, 사회적 고발, 실험적 서사구조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였지만, 최근 5년 간 메이저 극장 개봉작을 살펴보면 액션과 스릴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술성과 철학적 깊이를 가진 콘텐츠는 칸영화제가 주목하는 핵심 요소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영화는 이와 같은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으며, ‘범죄도시’처럼 국내 흥행에는 성공하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경쟁력을 잃는 작품들만 반복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장르 편중이 관객의 시선까지 제한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장르에 노출될 기회가 줄어들면서, 관객 스스로도 새로운 형식이나 목소리에 대한 수용력이 줄어들고 있다. 이는 장기적으로 콘텐츠 생태계 자체를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다양성의 붕괴와 투자시장의 보수화는 단순한 산업 현상이 아니라, 한국영화의 창의성과 실험정신을 말라가게 만드는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다. 칸이 외면한 이유는 단지 작품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의 한국영화가 국제 무대에서 말할만한 가치 있는 이야기와 독창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3. 높아진 기대와 반복되는 실망 – ‘기생충’ 이후의 그림자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차지했을 때, 전 세계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그러나 그 환호는 오히려 지금의 한국영화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관객과 산업 양쪽 모두 '기생충 이후의 작품'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먼저 관객 측면에서 보자. ‘기생충’ 이후 한국 관객들은 더 깊이 있는 주제, 사회를 성찰하는 서사, 그리고 구조적 상징성을 갖춘 영화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개봉되는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벌리는 반복된 서사와 장르물에 머무른다. 수년간 이어진 ‘복수극’이나 ‘범죄수사물’의 반복은 관객의 피로감을 불러왔고, 그 결과로 흥행 성적도 점차 하락하고 있다.
제작진 입장에서도 ‘기생충’ 이후 ‘또 다른 기생충’을 요구받는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자유로운 실험이나 작은 이야기를 시도하기 어려워졌다. 큰 성과 뒤에 따르는 기대치는 언제나 부담으로 작용하기 마련이고, 이는 작가와 감독들이 더 큰 자본에 얽매이고, 더 안전한 노선을 택하게 만든다.
특히 칸영화제와 같은 국제 영화제는 새로운 시선, 고유한 문화의 해석,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중시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 중,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다. '헤어질 결심' 이후 몇몇 시도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여전히 흥행 장르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칸의 외면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영화계가 그동안 무엇을 추구해왔는지를 정직하게 반영한 결과다. 산업이 쫓은 것은 글로벌 경쟁력이나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즉각적인 흥행과 ROI(투자수익률)**였다. 이 구조가 반복되는 한, 다음 ‘기생충’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며,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도 점차 흐려질 수밖에 없다.
결론: 지금 필요한 건 '실험할 자유'와 '다양성을 허용하는 시장'
2025년 칸국제영화제 초청작 발표에서 한국영화가 단 한 편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영화가 가진 창작 정신, 다양성, 그리고 실험정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반문하게 만든다. ‘한류’라는 말이 대중문화 전반에 통용되고 있지만, 영화만큼은 지금 콘텐츠의 내적 깊이와 표현방식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한국 영화산업이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흥행 성적이 아니다. OTT와 극장 사이에서 생존을 고민하는 현실을 넘어, 영화를 예술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생태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회복의 출발점은 다양성이다.
여성 서사, 성소수자, 다문화, 노동, 사회 갈등,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이 모든 소재와 장르에 대한 기획과 투자, 상영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정부와 공공기관,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기구들은 단지 박스오피스 1위 영화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영화 생태계 구축을 위한 제도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극장 유통 구조 개혁, 스크린 독과점 규제, 다양성 영화 지원정책의 실효성 제고는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의제다.
칸은 예술의 기준을 제시하는 영화제다. 지금 한국영화가 칸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외면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무대에서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대로 다시 올라가기 위해선, 지금까지의 ‘잘 되는 것만 찍자’는 논리를 버리고,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을 만들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야말로, 1990~2010년대를 수놓았던 한국영화의 진짜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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